혼돈에 질서를 부여하기-손광성의 수필쓰기
글쓰기에 가장 기본이 되는 것은 혼돈에 질서를 부여하는 일이다. 우리가 아무리 논리적으로 사고한다고 해도 그것은 무질서한 상태에 지나지
않는다.
대상을 볼 때도 그렇다. 한 대상이 우리의 의식에 들어올 때는 전체가 동시에 들어온다. 그러나 대상을 그림으로 그리거나 글로
써야 할 경우, 어떤 요소부터 먼저 그리거나 써야지 동시에 다 그리거나 쑬 수는 없는 것이다. 질서가 필요하다. 이런 계획이 서있지 않으면
문장이 통일성을 잃어서 비효율적이 될 뿐만 아니라 이해하기 어려운 문장이 될 때가 있다.
글의 전체적 구성은 물론 세부적인
열거,묘사,서사, 어휘의 선택과 어순 및 구절과 문단의 배열에 있어도, 어디에서부터 시작해서 어디에서 끝을 맺는가 하는 과정은 그 글의 성패를
좌우한다. 따라서 집필이란 무질서에 질서를 부여하는
작업이라 할 수 있다.
1. 열거에 있어서의 질서화
열거란 두
가지 이상의 사물을 늘어놓는 것을 말한다. 가장 단순한 듯한 이런 작업에도 일정한 질서가 전제된다. 그 질서가 지켜지지 않을 경우 그 글을
혼란스러워지는 것은 물론 효과마저 제대로 발휘되지 못하고 만다. 다음 글을 보자.
(A) "아내의 꽃밭에는 계절에 따라 온갖 꽃들이
핀다. 그 가운데서도 ⒜코스모스,⒝원추리,⒞아네모네,⒟장미,⒠맨드라미,⒡제비꽃,⒢팬지,⒣봉선화,그리고⒤국화는 아내가 제일 좋아하는
꽃들이다."
아무 생각 없이 읽으면 별 이상이 없는 것 같은 글이다. 그러나 좀 더 질서 있는 글이 되자면 이처럼 아무렇게나
늘어놓아서는 안 된다. 독자의이해를 돕기 위해서는 보다 세심한 배려가 있어야 좋은 글이 된다. 우선 이 글에 계절이란 말이 나온다. 따라서 여기
열거된 꽃들을 계절별로 분류해보면,⒞,⒡,⒢는 봄꽃이고,⒝,⒟,⒣는 여름 꽃이며⒜,⒠,⒤는 가을꽃이다.
(A)를 계절에 따라
고치면 (A')와 같이 된다.
(A')"아내의 꽃밭에는 계절에 따라 온갖 꽃들이 핀다. 그 가운데서도
⒞아네모네,⒡제비꽃,⒢팬지,⒝원추리,⒟장미,⒣봉선화 그리고 ⒜코스모스,⒠맨드라미,⒤국화는 ⒤국화는 아내가 제일 좋아하는
꽃들이다."
계절에 따라 질서 있게 열거되었다. 그러나 만족스럽지 못하다. 같은 봄꽃이라도 음절수가 긴 것과 짧은 것이 뒤섞여
있어 시각적으로 혼란스러운 데다가 점층적 효과도 얻지 못하고 있다. (A')다시 고쳐보자.
(A"))"아내의 꽃밭에는 계절에
따라 온갖 꽃들이 핀다. 그 가운데서도 ⒢팬지,⒡제비꽃,⒞아네모네,⒟장미,⒝원추리,⒣봉선화 그리고,⒤국화,⒜코스모스,⒠맨드라미는 아내가 제일
좋아하는 꽃들이다."
만약 이글에 계절이란 말이 없다면, 아내가 좋아하는 꽃들을 순서대로 열거할 수도 있을 것이다. 아니면
한자어를 먼저 쓰든가 외래어를 먼저 쓰든가 해도 무방할 것이다.
다음 글은 어느 수강생의 청바지라는 그의 초고이다. 읽고 질서를
부여해서 정리된 글을 만들어 보자.
(A) "청바지 하면 떠오르는 어휘들이 있다.
춤,시,꿈,별,숲,자유,노래,일탈,빗길,방황,모순,저항,갈등,혼돈,반역,파격,커피,눈물,기차,편지,바람,강물,희망,문학,일기,사진,첫눈,봄하늘,나룻배,첫사랑,자장면,오솔길,개망초,자전거,통기타,대학로,한여름,만년필,백사장,찔레꽃,스무살,맥주거품,베르테르,존
스타인 백"
한 마디로 말해서 혼란스러운 글이다. 그렇다고 이 글이 필자가 질서를 전혀 고려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앞에서
검토한 바와 같이 어휘를 나열할 때, 음절수의 길이를 고려하여 배열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만으로 45개나 되는 어휘들이 질서 정연하게 배열될
수는 없는 것이다. 우선 이 혼란을 수습하기 위해서 제재의 성격부터 정의해 보아야 할 것 같다.
청바지는 서구로부터 유입된
외래문화의 하나이며, 70년대 이후 청년문화의 상징으로 통하는 몇 가지 요소들 중의 하나이다. 따라서 청바지는 도회적인 것이지 향토적 성격과는
거리가 멀다. 따라서 향토성이 짙은 어휘인 별,숲,빗길,바람,강물,첫눈,봄하늘,나룻배,오솔길,개망초,한여름,백사장, 그리고 찔레꽃 13가지를
제외시켜 보았다.
(A") "청바지 하면 떠오르는 어휘들이 있다.
춤,시.꿈,자유,일탈,방황,저항,갈등,절망,혼돈,반역,파격,커피,희망,첫사랑,자장면,자전거,통기타,대학로, 스무 살, 맥주거품,존 스타인
백"
(A')보다는 많이 정돈되었지만 아직도 완전하다고 할 수는 없는 수준이다. 여기 남은 23가지 어휘를 추상어와 구체어로
분류한 다음, 동의어라 해도 좋은 어휘들은 하나로 통합했다. '갈등'은 '방황'에,'반역'은 '저항'에,'파격'은 일탈에,'희망'은
'꿈'에,각각 포함시켰다. 그런 다음, 음절의 길이에 따라 다시 배열해 보았다,
(A")"청바지 하면 떠오르는 어휘들이 있다.
시와 끔과 춤, 자유와 일탈과 방황과 저항,스무살과 첫사랑,커피와자장면, 기차와 자전거,대학로와 통기타와맥주거품 그리고 존
스타인백"
그리고 접속조사와 문장부호 등을 적절히 활용함으로써 문장에 리듬을 주는 효과까지 얻을 수
있다.
열거에 있어서의 질서화는 어휘에만 해당되는 것은 아니다. 내용의 열거도 포함된다. 이 때에도 두서없이 열거해서는 안
된다. 의도하는 바가 무엇이냐에 따라 질서를 세워야 한다. 그리고 그 배열은 내용의 경중에 따라 가벼운 것에서 차츰 무거운 것으로 점층적으로
올라가야 한다. 다음 예를 보자.
⑴ 월등사 주변에 있는 대나무 숲이 볼 만 하다.
⑵ 어느 날 대선후는 손님들에게
대나무의 미덕을 각각 말하게 한다.
⑶ 첫째 손님이 말하기를, 대나무는 그 순이 음식의 재료가 되기 때문에 좋다고 한다.
⑷ 둘째
손님이 말하기를, 대나무는 물건을 만드는 재료가 되기 때문에 좋다고 한다.
⑸ 셋째 손님이 말하기를, 대나무는 운치가 있어 좋다고
말한다.
⑹ 넷째 손님이 말하기를, 대나무는 계절이 바뀌어도 지조를 지켜 늘 푸르기 때문에 좋다고 한다.
⑺ 마지막으로 식영암이
말하기를, 이 대나무가 단번에 자라는 것은 하루 아침에 깨달음에 이르는 사람과 같고, 자랄수록 단단해지는 사람과 같고, 사람들에게 이롭게
하면서도 속이 빈 것은 욕심이 없는 부처님 마음과 같아서 좋다고 한다.
⑻ 대선후는 식영암의 말이 가장 옳다고 한다.
⑼ 후세
대나무를 좋아하는 사람들의 본보기가 되게 하려고 나는 이글 쓴다.
이 글은 하나의 제재인 '대나무'를 다섯 가지 측면에서
고찰하고, 그것을 다섯 사람의 입을 빌어 각각 말하게 한 다음, 사회자가 그 중 한 의견에 찬성하는 형식으로 서술되었다. 따라서 이 글의 주제는
대선후가 옳다고 한 다섯째 사람의 말, 즉 '욕심을 버리고 곧은 마음으로 남을 위해 살라'는 가르침이 될 것이다.
그런데 이 글의 필자가
첫째네 넷째 사람에게 주제를 말하게 하지 않고 마지막 사람에게 말하도록 배열한 것은, 주제의 효과를 극대화하기 위한 계산에서 나온 것임을 쉽게
알 수 있다. 다시 말해서 대나무 다섯 가지 미덕 중 지은이가 덜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실용적 측면(첫째 손님과 둘째 손님)에서 시작해서 미적인
측면(셋째 손님)으로,다시 윤리적인 측면(넷째 손님)으로 마지막으로 종교적 측면(다섯째 손님)으로 점층적으로 배열한 것은 극적 효과를 노린
계산에서 나온 것이라는 이야기다.
만약에 필자가 한 때 머리를 깎고 입산한 정도로 불교에 심취한 사람이 아니고, 유교적 이념에 투철한
조선조 선비였다면 이 글에서 넷째 사람의 주장은 어디에 위치했을 것인가 하는 문제다. 그렇게 된다면 넷째 손님과 말과 다섯째 손님의 말의 위치가
바뀌어야 할 것이다. 따라서 열거의 질서화는 필자의 의도에 따라 그 순서가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는 것이다. 주의할 것은 이런 경우라도
배열순서는 점층적이어야 한다. 그래야 효과가 커지기 때문이다.
열거는 시간적 순서에 따른 열거와 공간적 원근에 따른 열거가
있고, 대상에 경중에 따른 열거가 있다.
그제,어제, 오늘, 내일, 모레,과거,현재,미래,여기,거기,저기,나,가족,민족,인류 등이
그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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